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리천 전투 (문단 편집) ==== 반론 ==== 역사학자 류영철은 자신의 저서[* 류영철, 《高麗의 後三國 統一 過程 硏究》, 경인문화사, 2005]에서 위와 같은 과장설에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 허위라고 보기엔 '''군사 편제 상 병력 수가 백 단위까지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 후백제 멸망이라는, 고려로서는 필생의 목적을 위해 전례 없이 (이 부분까지 허위 과장으로 보지 않는다면) 타지 원군이 1만 4천 7백 명, '''이민족 군대만 무려 9천 5백 명이나 동원되었다.''' 당시 고려가 용병으로 끌어들인 [[흑수말갈|흑수]], [[말갈|달고]], [[철리국|철륵]] 등의 말갈계 집단은 고려와 같은 농경 사회가 아니었기에, 조인성이 고려 중앙군에 적용한 것과 같은 잣대를 적용해서 추정 인구에 비해 기록된 병력 규모가 과다하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중앙군 병력이 실제로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용병 숫자가 그렇게 많았을 리는 없으니 과장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뜬구름 잡기'''와 같은 논리밖에 없게 된다.[* 이는 '원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제성군(諸城軍: 여러 성의 군대)'에서 '제성'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의 과다를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과장설을 주장하는 논저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한 논증 없이 얼렁뚱땅 넘기고 있다.] 그만한 경군의 병력 규모가 과다하다고 할 수 없다.[* 이민족을 1만 가까이 동원했으므로,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고려군도 그보다 훨씬 많이 출전했어야 할 것이다.] *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4인이 '''고려군의 성세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고려군의 규모가 후백제군보다 비할 수 없이 거대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사료에 기록된 주요 일선 지휘관만 38명에 달하며 그 중에는 황실 [[종친]]이나 [[개국공신]] 등 '''당시 고려의 핵심 인물들이 총망라되어있다.''' 이는 1만 5천-2만 정도 규모 병력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전체 병력 수가 '전례 없이' 많았다는 점도, '''발해 유민의 유입과 신라의 항복으로 인적 자원이 대폭 늘어난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견훤까지 고려에 귀부하며 승부의 추가 고려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자, 그때까지 관망하던 남은 호족들도 대거 고려 쪽으로 넘어왔다고 보는 것[* 임용한, 《전쟁과 역사 1》, 혜안, 2001, p. 362]으로 얼마든지 설명이 된다. 애초에 수천 명씩 동원했던 것은 전세가 팽팽하던 시절에, 그것도 전선 중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인 반면 일리천 전투는 견훤의 귀부로 승기를 잡은 고려가 후백제 병합을 위해 한방 병력을 모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에 가깝다. 한편 역사학자 신성재는 2011년 발표한 논문[* 신성재, 일리천전투와 고려태조 왕건의 전략전술, 《한국고대사연구》, 2011]을 통해, 기록을 그대로 긍정할 경우 고려군이 개경을 출발한 시점이 늦어도 9월 초임을 감안할 때 9월 8일에 일리천에 도착하기에는 행군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행렬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모순이 생기므로 당시 고려 정부군의 실제 병력 규모는 최대 1만 5천 정도였을 거라는 견해에 대해서, '''"가을 9월에 [[왕건|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9월(초)란 시점은 개경을 출발한 때가 아닌 천안에 도착한 때'''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같은 견해가 타당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애초에 '''그만한 거대 병력이 분산 이동 없이 단일 대오로 움직이고, 또 행군 시에 모든 구간에서 일렬로만 걸었을 것이라는 것부터 상식적이지 않은 가정이다.''' 신성재는 같은 논문[* 일리천전투와 고려태조 왕건의 전략전술, 《한국고대사연구》, 2011]에서 "'''이후의 연구는 전투에 참가한 병력 수치를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려군이 일선군으로 우회기동한 이유에 대해 논자들마다 약간씩 견해를 달리하였다"고 하여 과장설을 수용하지 않고 일리천 전역 [[고려군]]의 병력 편제와 규모에 대한 기록을 신뢰하는 견해가 현재 학계에서 통설에 가까운 것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수 전쟁]]과의 비교도 적절치 않은데, [[수나라]]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 것은 '''인구의 2%를 동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113만 명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즉 동원병의 비율보다는 절대량이 너무 커서 무리가 갔던 것이지 2%를 동원하기만 하면 전부 국가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경우 농한기에 상당수의 시민들을 군대로 동원했고, 그러면서도 잘만 존속했다. 수십만의 인구로 수만 대군을 운용했던 [[고대 아테네]]의 사례가 대표적.] 실제로 고구려는 [[고구려-당 전쟁]]에서 [[주필산 전투|전투 한 번]]에 15만 명[*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구려 인구는 300만 내외라는 것이 통설이다. 15만 명이면 5%나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신성, 안시성 등 전방에 따로 군대가 주둔 중이었다.]을 동원했고, 결정적으로 고려 역시 [[통주 전투|30만 명]], [[귀주대첩|20만 명]], [[고려의 여진 정벌|17만 명]] 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일리천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이 주구장창 복무하는 군대가 아니라 일회성으로 모은 세력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실제로 그만한 병력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